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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4화. 인문고전 독서가의 삶: 율곡 이이 1 _ 이지성작가.

이뿐냉이 2010. 9. 15. 10:21

 

제24화. 인문고전 독서가의 삶: 율곡 이이 1

 

 16세기는 세계의 격동기였다. 티무르 제국, 킵차크한국, 아즈텍 제국, 잉카 제국이 멸망했고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레판토 해전이 일어났다. 성(聖)바르톨로뮤의 대학살과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했고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 사건에 반발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유럽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여왕에 즉위해서 대영제국의 기반을 닦았고 러시에서는 이반 4세가 러시아제국을 세웠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고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활약한 역사적 인물로는 칼뱅, 츠빙글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마키아벨리, 토머스 모어, 셰익스피어, 노스트라다무스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16세기는 망국(亡國)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시기였다.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임꺽정의 난, 정여립의 모반, 삼포왜란, 을묘왜변,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모두 이때 일어났다. 그 슬프고도 고통스러웠던 시대를 살았던 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는 1536년 음력 12월 26일에 태어났는데 세 살 때부터 최고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았다. 그는 네 살 때 『사략史略』을 뗐고, 일곱 살 때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을 뗐다. 여기서 ‘뗐다’는 의미는 단순히 읽고 암송하는 수준이 아니라 두뇌 속에서 지혜의 문이 열리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덕분에 그는 열 살도 되기 전에 천재 시인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고작 열세 살의 나이에 과거에 도전해서 장원급제를 했던 것을 보면 그는 대부분의 동양고전을 열두 살이 되기 전에 다 뗐던 것으로 보인다. 열세 살에 시작된 과거 응시는 스물아홉 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총 아홉 번 도전했고, 모두 장원급제를 했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제도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하는 독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과거에 장원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좋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아홉 번이나 과거에 응시했던 걸까? 정확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스물세 살 때 치른 별시(別試) 답안지로 제출한 ‘천도책(天道策)’이 과거 시험관들을 지적 충격에 빠뜨리고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명나라 지식인들을 큰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과거란 단순히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독서를 통해서 얻은 위대한 깨달음을 공유하기 위해 치르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렇듯 막강한 실력을 가진 그에게 성공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고 나중에는 대제학과 호조, 이조, 형조, 병조판서까지 역임했다. 한편으로 그는 왕을 가르치는 스승이었고,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이었으며, 『동호문답』 『성학집요』 같은 인문고전을 쓴 천재 저술가였다. 그는 바로 율곡 이이다.

 

나는 율곡 이이의 삶을 접하고 전율어린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삶이 어떻게 그처럼 아름답고 위대할 수 있는 것인지, 그는 참으로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땅에서 태어났으되 하늘에 속했던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율곡의 삶은 “인문고전독서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해준다.  

 

1551년 5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하늘로 돌아갔다. 열여섯 살이었던 율곡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 묘막을 짓고 3년 동안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서 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집에 새 여자를 들였다. 그리고 율곡이 스물여섯이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새 여자 권씨는 정식 후처가 아니었다. 그녀는 첩이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권씨는 술을 좋아했고, 성격이 매우 괴팍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어머니였던 신사임당 밑에서 자랐던 율곡에게 권씨의 존재는 재앙이었다. 열아홉 살 때 권씨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금강산에 있는 절로 들어갔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받았던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있겠다. 권씨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율곡을 괴롭혔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툭하면 방바닥을 두들겨대면서 시위하고, 빈 독에 머리를 처박고서 온 동네가 다 듣도록 통곡했다. 집안사람들이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괜한 트집이었다. 그때마다 율곡은 아무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권씨의 방문 앞에 꿇어앉아서 그녀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권씨가 목을 매달고 자살소동을 벌이다가 그 후유증으로 사흘 동안 앓아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율곡은 마치 친어머니 신사임당에게 하듯이 손수 약을 달여 바치면서 권씨를 극진히 간호했다. 율곡의 한결같은 사랑은 권씨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서서히 착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했고 나중에는 율곡의 덕을 사모한 나머지 율곡처럼 살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인문고전은 가족을 위해서 읽는 것이라는 율곡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자녀를 존중하는 이 세 가지는 율곡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천재들이 온 힘을 다해서 실천했던 덕목이다. 이는 서양의 천재들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천재들이 가진 아름다운 전통이다.

율곡이 서른 살 때 그러니까 조정에 들어간 지 약 1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영의정이자 왕의 외삼촌이었던 윤원형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윤형원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윤형원의 권세도 권세였지만 무엇보다 그는 조선에 피바람을 몰고 온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자살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왕에게 정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간언하는 것이 직업인 사간원마저 침묵하고 있었다. 그때 율곡은 붓을 들어서 윤형원의 수족이었던 요승 보우와 윤형원의 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둘을 조정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역적으로 몰려서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라며 경고하는 사람들에게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선비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율곡의 승리였다. 요승 보우와 영의정 윤형원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런 식의 ‘정치 바로 세우기’는 율곡의 평생에 걸쳐서 계속됐다. 여기서 우리는 인문고전은 ‘바른 정치’를 위해 읽는 것이라는 율곡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인문고전 독서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위대한 전통이었다. 그들은 설사 왕이라 할지라도 ‘바른 정치’에서 벗어나면 서릿발 같은 상소를 올렸다. 그 대가로 삭탈관직당하고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가고 심지어는 사약을 마시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고서 말이다.

 

 율곡이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청주(淸州) 목사에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다음 네 가지 규칙으로 구성된 ‘향약’을 반포했다.

 

  1. 서로에게 착한 일을 권합시다.

 2. 잘못된 일은 서로 고쳐줍시다.

 3. 서로 바른 예절로 사귑시다.

 4. 어려운 일은 서로 도웁시다.

 

 

 

 

그리고 ‘백성이 지킬 열 가지 규칙’을 함께 반포했다.

    1. 부모님께 효도합시다.

    2. 나라에 충성합시다.

    3. 형제간에 사이좋게 지냅시다.

    4. 어른을 공경합시다.

    5. 남녀 사이에 서로 존경합시다.

    6. 친척과 이웃끼리 화목하게 지냅시다.

    7. 자녀를 바르게 가르칩시다.

    8. 가난해도 청렴하게 살고 부유해도 겸손하게 살면서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맙시다.

    9.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합시다.

   10. 약속을 잘 지킵시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앞장서서 ‘향약’과 ‘백성이 지킬 열 가지 규칙’을 지켰다. 서른아홉 살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는 ‘향약’과 ‘백성이 지킬 열 가지 규칙’을 반포함과 동시에 거리 곳곳에 아래의 내용이 적힌 방을 크게 써 붙였다.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오. 도민이 잘 살기 위한 좋은 의견을 가진 사람도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오. 나와 함께 이야기합시다. 관청에서 내가 쓰는 곳은 우리 도민을 위한 사랑방으로 열어놓았습니다. 그러니 다들 오셔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와 같이 의논합시다.”

 

그는 청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향약’과 ‘백성이 지킬 열 가지 규칙’을 솔선해서 지켰고 실제로 백성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백성의 입장에서 처리했다. 덕분에 황해도와 청주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착한 마음과 아름다운 행실이 넘쳐나는 곳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문고전은 세상에 아름답고 착한 일들이 넘쳐나도록 하기 위해서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읽는 것이라는 율곡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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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지성 작가의 『인문고전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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