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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1화. 실전: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깨달음_이지성 작가.

이뿐냉이 2010. 9. 15. 10:19

제21화. 실전: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_깨달음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인 ‘반복독서-필사-사색’은 ‘깨달음’을 향해 있다. 이는 곧 ‘깨달음’이 있는 독서를 해야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깨달음’이 있는 독서란 책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문고전의 저자와 동일한 수준의 사고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다고는 하지만 글자만 읽고 마음은 읽지 못했구나. 『항우본기』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생각이나 하고 『자객열전』을 읽고서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치던 장면이나 떠올리는 것을 보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사마천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인문고전 저자의 마음을 아는 경지, 그것은 황홀한 기쁨과 함께 온다. 에라스무스, 니체, 헤르만 헤세는 그 경지에 도달한 순간을 “끝없는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마르틴 루터는 “그냥 푹 빠져버렸다”라고 표현했다. 하이데거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를 압도하고, 몇 년 동안 정신 못 차리게 만든 마력”이라고 고백했다. 괴테에게 그 순간은 “밝은 방 안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바그너에게는 “하늘의 선물”이었다. 베토벤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고, 천재 수학자 가우스에게는 “인생의 가장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마하트마 간디에게는 “나를 사로잡고 뒤흔드는 대 사건”이었고, 에이브러햄 링컨에게는 “감각과 감성을 단번에 사로잡는 영원한 아름다움”이었다.

퇴계 이황과 반계 유형원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고백은 ‘반복독서-필사-사색-황홀한 기쁨-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인문고전 독서의 극치를 잘 보여준다.

 

퇴계가 젊은 시절 『주자전서』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유례없는 무더위로 팔도강산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때 퇴계는 방문을 꼭꼭 닫아걸고서 독서했다. 그 소식을 듣고 걱정된 친구가 한달음에 찾아갔다. 이미 전에 한 번 독서하다가 중병에 걸린 전력을 갖고 있던 퇴계가 아닌가. 퇴계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친구에게 퇴계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가슴 가득 시원한 기운이 감돌면서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느낄 수조차 없다네. 어디 그뿐인가. 이 책을 읽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는데, 그 깨달음을 얻으니 독서가 갈수록 즐겁고 흥이 나네. 이 책의 의미를 충분히 깨우치고 나서 『사서』를 다시 읽었는데 성현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전혀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 아니겠나. 덕분에 나는 학문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네.”

 

어린 시절부터 인문고전 독서를 하면서 황홀한 기쁨에 젖었던, 다산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필사하라고 지시한 『반계수록』의 저자인, 모든 백성이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의 최고의 경제학자이자 조선 후기 실학 시대의 문을 연 천재 학자 반계 유형원은 자신의 평소 독서경험을 이렇게 남겼다. “밝은 창가 조용한 책상 앞에서 가지런히 두 손 모으고 단정하게 앉아서 종일 독서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읽다가 고요히 사색에 잠긴다. 책에 적힌 성인의 말씀과 내 사색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순간이 온다. 붓을 들어 그것을 기록한다.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을 만나면 밥과 잠을 잊고서 매달린다. 그러면 언젠가 마음에 깨달음이 온다. 그때 나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치고 내 입술에선 흥겨운 노래가 나오고 내 손과 발은 덩실덩실 춤을 춘다.”

 

다산 정약용은 『주역』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다. 인문고전 독서의 황제라고 할 수 있는 다산이었지만 유독 『주역』만은 책을 단지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속의 기가 꺾였기 때문이다. 하여 몇 번에 걸친 그의 독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마침내 다산에게 그날이 왔다. 감히 손 댈 엄두조차 못 내던 『주역』을 드디어 손에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산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독서하다가 죽어버려라!’를 선택했다. 그는 단순히 반복적으로 읽고, 베껴 쓰고, 사색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주역』은 그의 생각이 되었고, 마음이 되었고, 눈이 되었고, 입이 되었고, 밥이 되었고, 삶이 되었고, 세계가 되었고, 우주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다산은 마침내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는 경험과 함께 기적처럼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독서 경험을 들어보자. 다산이 음악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다가 얻은 경험을 덧붙인다.

 

“오로지 『주역』만을 책상 위에 두고서 밤낮으로 마음을 가라앉혀 탐구했더니, 계해년(1803년) 늦봄부터는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붓으로 베껴 쓰는 것에서부터 밥상을 대하고 뒷간에 가고 손가락을 퉁기고 배를 문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 결과 『주역』의 이치를 환하게 깨달았다.”

 

“지난 수년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사색하고 산(算) 가지를 붙들고 늘어놓고서 심혈을 기울였더니 어느 날 아침 문득 마음속에서 깨달음의 빛이 나타났다. 동시에 삼기(三紀), 육평(六平), 차삼(差三), 구오(具五)의 법이 빛처럼 번쩍이면서 눈앞에 열을 지어 나타났다.”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즉 환희와 함께 찾아오는 깨달음이 한때 평범했던 심지어는 둔재이기까지 했던 그들을 천재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괴테나 반계 유형원처럼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자질을 보였던 인물들의 입에서도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는 몇십 년 전 혹은 몇 년 전에는 세상으로부터 천재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그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독서 고백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의 인문고전 독서는 진정한 천재들의 그것과 비교하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빈약한 수준이다. ‘사색’은 말할 것도 없고 ‘반복독서’나 ‘필사’조차도 그렇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오른쪽 그림)의 “나는 크세노폰의 저작을 읽고는 정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책에 푹 빠져버렸다”거나 헤르만 헤세의 “공자의 『논어』를 처음 접했을 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감격적이었다.……중국 인문고전들을 접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처음의 벅찬 떨림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등의 고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뇌는 무엇인가를 읽고 쓰고 암송할 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 읽고 쓰고 암송하는 뇌의 사진을 그렇지 않은 뇌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신피질의 활동이 급격하게 증가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이 깊은 사색에 잠길 때 뇌에서는 전혀 다른 뇌파가 나온다. 아인슈타인이 사고실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동양 최고 수준의 바둑 명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전설적인 명상가가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을 때 나오는 바로 그 뇌파가 나온다. 인문고전을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고 사색할 때만 그러는 게 아니다.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신문 사설을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고 사색할 때도 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특별한 뇌파가 나온다. 그런데 인문고전을 읽고 사색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문고전의 저자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두루 깨닫는 경지에 도달하면 그 사람의 뇌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뇌의 모든 신경세포와 신경회로가 일순 눈부신 빛에 감싸여 전혀 다른 형태로 재탄생하고 재배열되지 않을까? 하여 그 사람의 두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고를 하는 위인의 뇌로 기적처럼 변화하는 게 아닐까? 나는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를 연구하면서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는 그 정도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면이 있었다.

 

나는 인문고전 독서교육도 ‘깨달음’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두뇌를 변화시키는 것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앞에서 제시한 ‘통독-정독-필사-자기 의견 갖기-인문고전 연구가와 토론하기’만 해도 두뇌의 변화를 경험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지성이라는 사람의 수준에서 말하는 ‘변화’에 불과하다. 즉 내가 말하는 방법을 따른다면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는 천재는 절대로 될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인문고전 독서 초보자에 불과하다. 나는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인 ‘반복독서-필사-사색-황홀한 기쁨-깨달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물론 나도 ‘통독-정독-필사’는 제법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인문고전독서의 진정한 경지인 ‘사색’의 세계에 발을 제대로 들여놓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좀 직설적으로 말하면 나는 천재들이 말하는 ‘사색’이 뭔지 모른다. 형편이 이러하니 중병에 걸릴 정도의 치열한 사색 끝에 찾아오는, 황홀한 기쁨과 위대한 깨달음은 당연히 경험해본 적이 없다.

 

물론 나는 인문고전을 읽을 때마다 어떤 놀라운 정신적 체험들을 하곤 했고 그것은 어떤 깨달음으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내 수준에서의 체험과 깨달음이었을 뿐이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자체가 바로 그 증거다. 만일 내가 천재들이 말하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나는 지금 인문고전 독서법에 대한 책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처럼 새로운 인문고전을 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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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지성 작가의 『인문고전 독서법』
글쓴이 : 인문고전 독서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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