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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6화. ‘나’와 ‘너’와 ‘우리’를 위한 인문고전 독서_이지성 작가.

이뿐냉이 2010. 9. 15. 10:15

제16화. ‘나’와 ‘너’와 ‘우리’를 위한 인문고전 독서

 

나의 인문고전 독서는 1)저자만 있는 단계 2)‘나’가 나타나는 단계 3)‘너’가 나타나는 단계 4)‘우리’가 나타나는 단계를 거쳤다. 처음에 나는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 그저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집요할 정도로 ‘저자’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 열망이 1차원적 독서밖에 할 줄 몰랐던 나로 하여금 2차원적 독서를 하게 했다. 나는 인문고전의 내용을 나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몇 년이 지나자 ‘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멘티들에게 인문고전에 기반한 멘토링을 해줄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나타나는 단계에 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내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그런 주제를 놓고 묵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세상에는 인문고전을 좔좔 외우면서도 ‘너’나 ‘우리’는커녕 ‘나’도 나타나지 않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인문고전 독서가들이 의외로 많다. 나는 처음에 그런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연구해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들에게는 ‘열망’이 없다는 것이다. ‘나’와 ‘너’와 ‘우리’를 아름답고 지혜롭게 성장시켜서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간절한 열망 말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가슴이 아닌 머리로 독서하는 사람들이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인문고전을 읽는 행위 자체를 무슨 대단한 지적 행위를 하는 것인 양 여기는, 인문고전을 통해 얻은 지식을 뽐내고 싶어서 안달하는, 인문고전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심하게 깔보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문고전 저자들이 꿈꾼, 인류의 이상이 실현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지 않는 인문고전 독서가는 그 존재 자체로 인류의 수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정도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는 나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분투’를 하고 있지도 않은 나이기에 ‘그들’을 비판할 자격은 없지만, 그들에게 안타까운 감정은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슴으로 하는 독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기를. 그러면 세계는 지금보다 행복한 곳이 될 것이다.

 

나는 인문고전 해설서를 거의 읽지 않았다. 아니 해설서를 몇 권 읽어본 뒤 의도적으로 해설서를 멀리했다. 그 기간이 약 7년에 달한다. 내가 해설서를 멀리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해설서 집필자들은 대부분 인문고전 연구 경력이 화려하다. 쉽게 말해서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그러다보니 초보자인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는데, 그게 나의 발전을 저해했다. 인문고전을 내 관점이 아닌 그들의 관점으로 읽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즉 나는 인문고전을 그들의 두뇌로 읽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물론 해설서 집필자들은 대단히 뛰어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천재는 못 된다. 천재의 저작은 천재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또 해설할 수 있다. 이것은 상식이다. 즉 현대의 연구자들이 쓴 해설서들은 원작자인 천재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것일 수 있다.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 것일 가능성이 100%다. 나는 해설서를 읽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오랜 시간 고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고, 해설서와의 인연을 단칼에 끊었다.

 

둘째, 나는 인문고전을 날것 그대로 만나고 싶었다. 나도 인간이고 인문고전의 저자들도 인간이고 해설서 집필자들도 인간이다. 하나님 앞에 서면 나나 인문고전의 저자들이나 똑같이 평등한 존재인데, 굳이 다른 인간(해설서 집필자)의 도움을 얻어가면서까지 그들(인문고전 저자들)을 만나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했고, ‘아니다’라는 답을 얻었다. 한편으로 나는 해설서 독서는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인문고전을 단 하루 읽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문고전은 비록 처음엔 두뇌 고문과도 같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두뇌가 열리고 어떤 빛 같은 게 두뇌를 채우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두뇌의 근본적인 변화, 즉 둔재가 천재로 변화하는 순간은 그런 경험이 절정에 이른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해설서 독서는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하여 나는 해설서를 내 책장에서 치워버렸다.

 

나는 작년부터는 해설서를 즐겨 읽고 있다. 이제는 읽어도 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해설서가 두렵지 않다. 아직도 초보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문고전을 제법 접하다보니 해설서 저자의 의견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제도 중국의 한 유명 대학 교수가 쓴 동양고전 해설서를 읽었는데, 나는 그의 몇몇 의견, 특히 묵자에 관한 부분에서 치명적인 한계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옛날 같았으면 나는 그 교수의 의견에 압도되었을 것이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인문고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해설서에는 인문고전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다. 때문에 나는 해설서는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기에 있어서는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하고 최소 3년, 최고 10년이 흐른 뒤가 적당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아니 좀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당신의 내면에 인문고전 독서 능력이 제대로 자리잡은 뒤에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덧붙이자면 인문고전 독서 능력은 인문고전을 날것 그대로 치열하게 읽다보면 저절로 생긴다.

 

인문고전 독서는 체계가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읽고 플라톤을 전기, 중기, 후기로 구별해서 읽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체계를 따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체계라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다. 나는 무턱대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중요한 것은 천재들의 사상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천재들의 마음을 끌어안고 얼마나 치열하게 뒹굴었느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인문고전 독서 목표는 인문교양 서적 저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인문대학 교수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돌덩이 같은 머리를 좀 괜찮은 두뇌로 만들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철학 그 자체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다보니 체계가 저절로 잡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다보면 플라톤을 읽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독서를 중지하고 플라톤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플라톤을 읽다보면 프로타고라스라든지 파르메니데스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모르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 결국 플라톤 독서를 중지하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수밖에 없다. 동양 고전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나는 꽤 무식하게 체계를 잡은 셈인데, 그래도 나는 이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처음부터 체계를 잡아놓고 읽기 시작하면 독서의 재미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아무 책이나 골라서 읽다가 불현듯 얻게 된, 앞선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음, 그것이 나에게는 굉장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나는 내가 읽은 인문고전을 거의 대부분 베껴 쓰기, 즉 필사를 했다. 처음에 필사를 시도했던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으니 한번 필사해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필사를 해보니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아이들을 보내고 교실에 홀로 앉아 클래식을 틀어놓고 철학고전을 필사했을 때마다 느꼈던 그 강렬하고 특별했던 감정들을. 어느 겨울날 새벽에 홀로 깨어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필사를 했을 때 체험했던 그 놀라운 깨달음들을. 나는 필사를 하면서 인문고전 저자를 직접 만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하얀 종이 위에 찍힌 검은 글자들이 단순한 글자로 머물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대화’로 변해서 나에게 다가오던 그 순간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순간들은 필사를 할 때 주로 찾아왔는데, 나는 그 순간들이 쌓여서 나의 작은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주로 새벽이나 방과 후 교실에서 필사를 했다. 하지만 자투리 시간도 많이 활용했다. 예를 들면 키르케고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EBS TV 녹화를 하러 갔을 때, 대기실에서 했다. 학교별로 40명씩 나와서 하는 퀴즈 대항전 프로였다. 2시간 연속 녹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이들을 인솔해서 녹화무대로 보내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해서 나는 키르케고르를 꺼내들었고, 필사를 했다. 『맹자』의 5분의 1은 지하철에서 필사했고, 『범주론(아리스토텔레스)』의 절반은 공원 벤치 등에서 필사했다.

 

나는 노트에 하는 필사를 선호했는데 어느 날 워드 필사의 편리함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약 5~6년 동안 워드 위주의 필사를 했다. 그런데 워드 필사는 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나는 필사를 하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자판을 세게 내려치는 경향이 있는데, 인문고전 같은 경우 거의 모든 구절이 좋은 구절이었다. 게다가 나는 멋진 작가가 되기 위해 인문고전 외의 책들도 매일 필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내 손가락들은 늘 작은 파스와 대일밴드를 붙이고 살아야 했다. 특히 왼손이 심하게 아팠는데 나중에는 합기도에서 하듯이 다른 손으로 왼손을 꺾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어깨가 늘 찌르듯이 아팠다. 필사를 한창 열심히 하던 때는 어깻죽지 통증이 하도 심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길거리 등지에서 소리를 지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2008년부터는 워드로 하는 필사를 실질적으로 그만두었다. 대신 집에 있는 복사기로 책을 몇 쪽씩 복사한 뒤에 각 행 밑에 있는 여백에 필사를 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필사는 보통 한 번만 했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책들은 여러 번 했다. 철학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필사했고, 문학고전은 가슴에 와닿는 부분만 필사했다. 역사고전은 한 권도 필사하지 않았다. 철학고전 중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따로 출력해서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서 소리 내어 읽었다. 이해가 될 때까지 그렇게 했다. 물론 내 수준의 이해였지만. 자동차가 생긴 뒤부터는 mp3에 인문고전을 녹음해서 운전중에 듣는 방법도 쓰고 있다. 최근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를 이런 식으로 다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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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지성 작가의 『인문고전 독서법』
글쓴이 : 인문고전 독서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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